칼뱅교와 영국 성공회의 음악
칼뱅교의 음악
종교개혁은 스위스와 프랑스, 네덜란드에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음악의 경우 독일과는 다르게 전개되었다. 스위스의 경우 다른 유럽 나라들과 같이 왕이나 제후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것이 아닌 부유한 도시들이 독립적으로 각각 유지되는 나라였다. 따라서 처음 스위스의 종교적 상황은 각 도시마다 제각기 다르게 나타났다. 스위스에서 나타난 종교개혁은 빙글리에 의해 취리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빙글리의 개혁 내용은 독일에서 일어난 루터파의 개혁과 유사했지만 성찬 의식에 대해서는 루터와 다른 의미의 입장을 제시했으며 결국에는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했다. 그러나 이후 츠빙글리는 가톨릭 세력을 상대로 한 종교 전쟁에서 종군 목사로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였다. 이후 스위스의 종교 개혁은 제네바에서 활동한 칼뱅에 의해 성공적인 결말을 맞게 되었다. 칼뱅은 매우 엄격한 금욕주의와 개인의 도덕성을 강조하였으며 예정설을 주장했다. 16세기 중반 제네바는 당시 종교 개혁의 중심지로서 전 유럽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칼뱅의 교리는 유럽의 다양한 지역에 전파되었다. 칼뱅의 교회에서는 성경에 없는 가사를 노래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단성 시편을 반주 없이 부르는 것만이 허용되었다. 1562년 칼뱅파의 대표적 찬송가집 <제네바 시편서>가 제네바, 리옹, 파리 등에서 동시에 출간되었다. 이 시편서에는 150여곡의 무반주 단성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칼뱅파 교회에서는 음악을 장식적으로 꾸며 노래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편의 선율은 단순하며 주로 순차진행이 나타난다. 시편의 인기는 단성뿐만 아니라 다성 시편의 작곡으로까지 이어졌다. 교회 안에서 부르는 노래는 단성 시편만 허용되었지만 일반적인 가정기도에서는 다성 시편을 노래할 수 있었다. 부르주아, 구디멜 등이 다성 시편들을 출간하였다. 그러나 칼뱅표의 시편은 루터교의 코랄처럼 더욱 큰 규모의 성악곡이나 기악곡으로 확장되지는 못했으므로 음악사적으로는 그다지 중요성을 가지지 못한다.
영국 성공회의 음악
영국에서의 종교 개혁은 헨리 8세의 개인적 이혼 문제와 더불어 교황과 로마에 대한 국민적인 반감과 민족주의적 정신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헨리 8세는 루터교를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한동안 영국 교회에서는 교황이 없는 가톨릭 의식 형태를 유지했다. 1534년이 되자 헨리 8세는 정식으로 가톨릭교와 결별을 선언하고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되었다. 이어서 수도원을 폐쇄하고 그 토지를 몰수하여 왕실의 자산으로 하였다. 그러나 헨리 8세의 개혁은 신앙적인 이유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바로 전례나 음악에 대한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라틴어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이후 전례에서 점점 영어가 라틴어를 대신하게 되었고 1536년부터 영어로 번역된 성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에드워드 6세는 전반적인 개혁을 실시하였다. 1549년에 통일령이 선포되어 모든 공공 예배에서는 <일반 기도서>에 규정된 전례의식을 사용하게 되었다. 대규모의 성가대는 해산되었고 교회 오르간도 제거되었으며 라틴어 음악 예배가 제한되는 대신 영어 가사로 된 노래들이 장려되었다. 메리 여왕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그녀의 재위 기간동안 잠시 가톨릭교로 돌아가기도 하였으나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다시 영국 국교회로 복귀하고 1559년 통일령을 선포하면서 영국 국교회 체제가 확고해졌다. 영국 국교회가 성립됨과 함께 새롭게 탄생한 교회음악은 영어 가사를 노래하는 서비스와 앤섬이다. 서비스는 가톨릭의 미사에 해당하는데, 사용된 음악 양식에 따라 대서비스와 소서비스로 구분된다. 대서비스는 대위적이고 멜리스마틱한 양식이고, 소서비스는 실라빅하며 수직화음적 양식이다. 앤섬은 가톨릭에서의 모테트에 해당하며 완전 앤섬과 운문 앤섬으로 구분된다. 완전 앤섬은 전체가 합창으로 노래하는 대위적인 양식이고 악보상으로는 무반주 양식이지만 실제로는 반주를 수반했을 가능성이 있다. 운문 앤섬은 독창부와 짧은 합창이 교대로 노래하는 양식으로 되어 있으며 오르간이나 비올 등의 반주가 수반된다. 16세기에 가장 중요한 앤섬 작곡가들은 탈리스와 버드, 몰리가 있다. 탈리스는 16세기 중엽 이후 대표적인 영국 음악의 작곡가이다. 헨리 8세부터 엘리자베스 1세 시대까지 40년 이상 왕실의 교회 단원으로 임했으며 그의 교회 음악은 영국의 종교 분쟁 과정이 그대로 반영된다. 헨리 8세 시대에는 미사곡과 봉헌 안티폰, 에드워드 6세 때에는 서비스와 앤섬, 메리 여왕 때에는 라틴어 찬미가들과 미사곡, 그리고 엘리자베스 여왕 때에는 라틴어 가사와 영어 가사를 가진 교회음악을 모두 작곡했다. 윌리엄 버드는 탈리스의 제자로 추측되며 교회음악뿐만 아니라 버지널 음악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가톨릭교도로서 버드는 라틴어 모테트와 미사곡들을 작곡하였으며 영국 국교회음악으로는 5편의 서비스, 60곡의 앤섬 등 많은 영어 가사의 노래들을 작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