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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사

서양음악사- 르네상스(7) 루터교의 음악

by 돌체밀 2024.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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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루터교의 음악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수이자 신부였던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로마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가 부당하다는 내용을 포함한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대문에 붙였다. 당시에 성당의 대문은 마치 대학의 게시판과 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독일어가 아닌 라틴어로 글을 적었다는 것은 대학 내에서의 학문적 토론을 목적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루터의 이러한 행동은 부패가 만연했던 가톨릭교의 타락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민중을 선동하기 위한 목적이나 종교 개혁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것이 불씨가 되어 정치적, 사회적 문제로 파급되면서 종교 개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전개되었다. 루터에 의해 벌어지게 된 이 사건은 얼마 되지 않아 전 유럽에 퍼지게 되면서 루터는 결국 교황과 대결하게 되어 1521년 파문당했다. 또한 다른 종교적 지도자들 및 군주들 중 로마 교황청과 결별을 선언하는 사람들과 함께 루터는 종교개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루터는 파문을 당하고 약 1년간의 망명 기간을 거친 후 비텐베르크에 다시 돌아와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현공의 아래에서 종교 활동을 재개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유럽의 많은 사람들은 교회 정부의 중앙 집권화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외국인 교황이 각 나라의 교회 문제에 간섭하였고 교황청은 거액의 종교세를 징수하여 그들의 호화로운 생활을 위한 자금 이나 정치 자금으로 사용했다. 한편 독일은 추기경단뿐만 아니라 교황청 관료에도 속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의 민중들은 로마 교황청에 대한 반란의 편에 선 루터를 추종하였다. 당시 전통적인 도덕주의적 성직자들 또한 개혁을 원하였고 이에 합세하였고 일부 제후들도 종교세에 대한 불신과 절대적 주권을 얻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루터를 지지하였다.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 개혁은 독일뿐만 아니라 스위스와 영국 등지까지 파급되면서 유럽 사회를 뒤흔든 사건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루터교가 확립된 시점은 1530년 로마 황제 카를 5세가 소집한 아우크스부르크 국회에서 루터의 협력자 멜랑크톤이 편찬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통해 루터파의 신앙이 피력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고백은 그다지 인정되지 않았으며 이후 1555년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을 수습하기 위한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에서 루터파를 승인하면서 개신교(프로테스탄트교)로 분리되었다.

 

루터교 음악

루터는 소년 성가대원 출신의 테너 가수이자 류트와 플루트를 능숙하게 연주할 수 있는 연주자이기도 했는데, 그는 음악의 윤리적인 힘과 교육적 효과를 인정하였다. 루터는 음악을 신학 다음으로 중요한 가장 큰 선물이자 축복이라 생각하였고 신도들의 신앙심을 더욱 고취시키는 데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믿었다. 16세기 루터교 교회에서 음악의 위치는 루터의 음악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루터는 전례를 단순화시켰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전례의식의 주요 윤곽은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루터는 라틴어를 잘 알지 못하는 평신도들을 위해 <독일어 미사와 예배 순서>를 출판했지만 전례의식과 음악은 독일어와 라틴어 두 가지 언어를 모두 사용하였고 특히 라틴어 평성가로 된 미사 통상문의 다섯 부분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초기 루터교 음악에서 중요하게 여려지는 작곡가는 발터이다. 발터는 충실한 루터교 신자였으며 루터가 <독일어 미사와 예배 순서>를 편찬할 때 조언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코랄은 루터교가 성립되면서 함께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교회음악이자 루터교 음악의 핵심이다. 이전의 가톨릭 교회에서 일반 신도들은 전문 성가대원들이 부르는 라틴어 다성음악이나 사제들이 부르는 라틴어 성가를 듣기만 하는 입장이었던 것과 다르게 루터교에서는 일반 신도들이 코랄을 회중 찬미가로 직접 부르게 되면서 예배에 보다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초기의 코랄은 회중들이 다함께 제창으로 부르는 단선율 무반주 노래였다. 그러나 곧 성가대가 부를 수 있는 다성 코랄들이 작곡되기 시작했고 반주가 따르는 성가대의 다성 코랄과 무반주로 부르는 회중들의 단성 코랄이 번갈아가며 노래되기도 하였다. 초기 루터교 교회에서는 한번에 많은 양의 코랄이 필요하였다. 코랄은 완전히 새롭게 작곡되기도 하였지만, 이미 있던 선율에 새로운 가사를 붙여 만드는 콘트라팍툼 형태로 많은 코랄이 만들어졌다. 여기에 필요한 선율은 그레고리오 성가, 비전레적인 종교 노래, 세속 선율이나 민요 등에서 차용했다. 코랄에서 파생된 다성 합창곡으로는 다성 코랄이 있다. 다성 코랄 중에서는 최상성부에 선율을 두고 호모리듬적으로 진행하는 칸티오날 양식이 가장 유행하였다. 코랄 모테트는 2성부 이상으로 된 음악으로 코랄 선율을 정선율로 테노르에 인용하였다. 또한 코랄의 가사와 선율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16세기 말에 이르러 코랄 선율이 모방적으로 진행하는 방식을 많이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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